순전히 재미로 읽는 책 / / 2023. 2. 11. 22:06

[사랑의 이해] 사랑만 원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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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에서 드라마 <사랑의 이해>를 보다가 안수영이 소경필과 잔 시점에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원작 소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드라마 탓에 원작 소설이 인기가 많아지면서 동네 도서관들에서는 대출이 불가한 상태라서 카카오페이지에서 돈을 내고 읽었다. 원작은 드라마와 같은듯 달랐지만 안수영이 소경필과 자기로 결심할 때의 마음은 어쨌든 이도저도 아니라서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하상수는 드라마에서는 비현실적인 캐릭터로 보일 때가 있었다. 안수영이 소경필과 잔 걸 알고나서도 안수영을 찾아다닌 게 그랬다. 정성껏 마음에 들게 쌓아놓은 모래성을 누군가가 혹은 파도가 무너뜨릴까봐 자기 손으로 부수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는 안수영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을 좋아하지만 그 관계가 주변의 여건 때문에 망가질까봐 스스로 파괴하는 선택을 했다고 믿으며 그녀를 찾아다니는 하상수가, 나는 사실 믿기지 않았다. 내가 40대가 되어 내린 결론은, 현실 속 대부분의 남자들은 절대 그런 상황에서 그 여자를 찾아다니진 않을 것이란 거다. 욕을 하면 욕을 했지. 

 

원작 소설 속 하상수가 차라리 더 현실적이었다. 즉, 더 찌질했다. 안수영을 간보다가 종현에게 잃고서는 자신과 급이 달랐다며 합리화하고, 박미경과 만날 때는 자신의 급이 딸려 자격지심에 쩔어 행동하고, 그로 인한 허무감을 안수영의 유혹으로 달래더니 결국은 미경과 헤어지고. 미경이 좋은 여자였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급이 애매한, 찌질한 남자들의 전형이라고 할까. 본인이 급이 애매하면 상대방을 끊임없이 저울질하는 게 남자들이므로. 물론 여자도 예외가 드물겠지만. 

 

모두들 부르짖는 사랑에, 사랑만 있기는 참 힘들다. 비현실적이다. 현실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급이 아니라면. 혹은 비루한 현실을 부정하고 미친 척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사랑의 비루한 구석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소설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항상 극소소의 재벌과 노동자 계급의 동화같은 사랑을 그리는 드라마만 있었는데, 이렇게 비루하고 남루한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소설과 드라마를 보니 현실적이어서 반가웠다. 드라마에서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현실은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드라마가 아무리 현실적이어도 드라마는 드라마일수 밖에 없으니. 

 

 

♣ 연습장에서 나와 경필과 헤어지고 상수는 집으로 차를 몰았다. 은행원 생활 아무리 잘해 봤자 장가 잘 가는 것만 못하다는 말을 곱씹었다. 사실 그렇게 보면 수영과 틀어진 것도 잘된 일이었다. 듣기로 수영의 집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고 수영 역시 계약직 창구 직원이었다. 조건으로만 따지면 외모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종현도 마찬가지였다. 잘생기고 어리다는 것이 장점일 뿐 아르바이트생이나 다름없었고 본업은 고시생이었다. 떨어지면 쪽박이었고 붙어도 고작 경찰, 연봉에 연금까지 다 쳐 준다고 해도 은행원 벌이에 비하면 우스웠다. 솔직히 수영도 알고 있지 않을까? 

 

♣ 수영은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복도의 벽을 짚었다. 지점장의 말이 맞았다. 원래 미경의 일, 계약직 창구 직원인 자신에게 하라고 시켰을 뿐인, 그렇게 시켰고, 시킬 수 있는 많은 일 중 하나였을 뿐이다. 계속 그 일을 하게 해 줄 것이라고, 또 그쪽으로 진로를 열어 줄 것이라는 언질은 하나도 없었고 모두 자기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하지만 왜? 멍청해서? 어리석어서? 잠깐 눈이 멀어서? 꼬투리 하나 남기지 않으면서 그런 기대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지점장이었다. 꼬투리 하나 없는데 그런 기대감을 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수영 자신이었다. 줄 듯 줄 듯할 수 있는 것은 지점장의 유력 때문이었고, 안 줄 것을 알면서도 줄 듯 줄 듯할 때마다 입을 뻥긋거릴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무력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격차, 그래서 더 아프고 굴욕적인 위압, 모멸감, 창피스러움. 수영은 화장실로 갔다. 

 

♣ 사실 수영의 말이 맞았다. 망설였다. 관계를 더 발전시킬지 말지. 수영이 텔러, 계약직 창구 직원이라는 것, 정확히는 모르지만 변두리 어느 대학교를 나온 듯한 것, 다 걸렸다. 일도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그 두 가지가 상수 자신의 밑전이었기 때문에, 상수가 세상에서 지금까지 따낸 전리품이자 직장과 일상생활에서 그 위력과 차별을 나날이 실감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래, 간 봤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래서, 뭐? 그게 뭐가 나쁜데? 그만큼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거 아닌가? 진심이니까, 정말 좋아하니까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 생각할수록 억울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 바로 옆 창구에서 별 차이 없는 일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서로 달랐다. 정규직과 계약직, 행원과 텔러. 조직이 주입해서든 스스로 장착해서든, 상수가 먼저든 수영이 먼저든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격차가 있었다. 난감하고 불쾌한 순간이 항상 있거나 생길 수 있었다. 미경과 있을 때는 그런 불안이나 불편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함께 있고 함께하는 즐거움에 몰두하기만 하면 됐다. 왜 진즉 미경을 마주 보지 않았을까? 애초에 사이즈가 안 맞았던 수영에게 왜 그렇게 집착했을까? 

 

♣ 아무도 우리를 상수와 미경처럼 봐 주지 않을 거라고, 결국 잘생긴 청경 꼬신 텔러, 예쁘장한 텔러 후린 청경이 될 뿐이라고. "흥미롭게 지켜들 보겠죠. 얼마나 갈까, 어떻게 될까?" 수영이 그렇게까지 생각할 게 뭐냐고, 사람들 남의 일에 그렇게 관심 없다고 말했지만 종현은 차갑게 웃었다. "남의 일이라서 더 잔인하고 적나라하게 벌거벗기는 게 사람들이에요. 자신과 다를수록, 위가 아니라 아래에 있을수록 더 뻔뻔하게, 무자비하게." 

 

♣ 참 달랐다. 결혼이, 함께 산다는 것이 단지 마음과 성격의 문제이기만 하면 되다니. 짜증이 나면서도 부러웠다. 수영은 웃었다. 울기는 싫으니까. "테스트 해 봐요. 같이 살 만한 남잔지 아닌지."

 

♣ 요컨대 미경의 뜻을 따르는 것은 늘 최선이자, 최상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왜 가끔씩 그러기가 싫을까. 왜 눌리고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까? 

 

♣ 상수는 미경이 골라 온 것들을 계산대에 올렸다.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하지만 최종 금액은 옆구리를 걷어차는 발길질 같았다. 상수는 신음을 내뱉는 대신 지갑을 꺼냈다. 다른 계산대의 남자들이 그러듯. 

 

♣ 상수는 내키지 않았다. 200만 원이 넘는 패딩을 받는 것도, 나중에 그만한 선물을 해야 하는 것도 모두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역시 아무 말도 못했다. 위축감이라고 말하기도 싫은 위축감을 느끼며 상수는 고르는 척했다. 

 

♣ 종현은 자신의 무력이 수영에게까지 번지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내 미안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돼 있었다. 시험도 더 좋아지고 행복해지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파탄 나 더 굴러떨어지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합격해야 하는 것이었다. 종현은 시험 준비에 매진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부러진 발목이나 뒤틀린 팔꿈치를 보는 것처럼 명백했다.

 

♣ 두 사람이 함께 살게 된 것은 분명 사랑 때문이지만, 사랑만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기울어 있었다. 아마 사랑일 것이라고, 그렇게 믿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더 깊게 생각하는 것도 지금의 자신에게는 모두 사치엿다. 어쩔 수 없는 일 같았다. 빠르게 달릴수록 가까운 풍경은 흐릿해져 흘러가니까. 그렇게 흘려 지나치도록 달려야만 목표에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 

 

♣ 자신과 미경, 이 관계의 일면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미경에게 밀리고 눌리는 것 같던 기분은, 기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동경과 선망에 끌려 때로 배려와 양보라는 명분으로 때로 결혼이라는 목적으로 그것을 덮어 보려고 했을 따름이었다. 미경의 사람들을 만나고나면 왜 그렇게 속이 헛헛했는지, 미경의 사촌오빠와 헤어질 때 왜 자신도 모르게 직장 상사에게 하는 행동이 나왔는지 모두 명백했다. 미경은 자신과 급이 달랐고 앞으로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척하고 싶지만 모를수 없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지만, 아팠다.

 

♣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나처럼 유리 한 장이 바닥인 놈은 못 뛰어. 더 높게 뛸수록 와장창 박살이 나니까. 굴러떨어지면 어디로 굴러떨어질지 환히 보여서,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니까. 콘크리트 바닥인 애들은 달라. 걔네들한테는 뛰든 말든 하고 싶고 말고의 문제야. 뛰고 뛰다가 다 싫어지면 관두고 딴 거 해도 돼. 우리 엄마 같은 사람 자르고 자기네 건물 청소나 해도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 차라리 부러워나 하지." 종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난 뭐가 될까? 이것도 못 되는 난 도대체 뭐가 될 수 있을까!"

 

♣ 수영은 얼굴을 가린 채 물었다. "날 사랑해?" "사랑했어요. 확실했지만 이젠 모르겠어요. 사랑해서 여기에 있는지, 여기에 있을 수밖에 없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지. 나도 이러는 게 싫은데, 미칠 것 같은데, 정말 모르겠어요."

 

♣ 제야의 종소리 특집 방송이 나왔다. 광화문 보신각에 나간 기자가 인파 속에서 생중계 중이었다. 벅찬 얼굴과 흥분한 목소리이기는 했지만 뭐가 그렇게 벅차고 흥분스러울까. 이리 밀고 저리 미는 인파 속에서 한 해 마지막 날도 나와서 일을 하고 있을 뿐인데. 하긴, 저 표정도 일의 일부겠구나. 돈을 받으니 짓는 것이겠구나. 능력 있는 아버지도 없이  창구 앞에 앉아 있는 내 얼굴처럼. 상수는 자꾸 이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미경과 있으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수영과 가까워질수록 미경은 점점 더 자신과 다른 사람 같기만 했다. 가지려고 애써봤짜 결국 안 될 사람, 끝내 급이 다를 사람. 수영을 만나면 지금껏 다렬오고 앞으로도 달려가게 될 궤도에서 벗어나는 기분이었다. 미경에게서 어른거리던, 자신을 풍선처럼 부풀게 하고 동시에 독방처럼 옥죄던 중상위층의 생활, 윤택하게 반들거리는 온실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것 같았다. 

 

♣ 늘 짓눌리고 답답하던 굴레는 미경이 자신에게 씌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뒤집어쓴 것이었다.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뭐라도 돼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렇게나 자기는 다르다고, 그저 그런 남자새끼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처참하게 똑같았다. 미경을 속였고 자신을 속인 것이었다. 행복이라는 마네킹을 비추는 것 같던 거짓의 그 밝고 좁은 조명은 기실 처음부터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 종현이 두 번 아주 늦은 밤에, 동이 터 올 무렵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수영도 깊이 묻지는 않았다. 넘겼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됐다. 어렵지조차 않았다. 하지만 당장 불을 켜고 소리 질러 종현을 깨우지 않은 것은 종현을 이해해서가 아니었다. 사랑해서, 종현이 그 거지 같은 사랑이어서. 그것을 일깨운 사람은 상수였다. 성모상 앞에서, 인중으로 느낀 따스하던 숨결,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던 가늘고 빈약한 떨림. 기분이나 생각이 아닌 감각이었다. 엄마가 오지 않던 초등학교 정문 수위실에서 맡은 비 냄새, 엄마와 아버지가 다투고 난 것을 직감할 수 있던 거실 공기의 음울한 촉감처럼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도 또렷하게 되새길 수 있을 것 같은 감각. 수영은 상수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손끝이 떨려오고 갑작스레 떨어지는 빗방울마저 그 머리에 떨어질까 두렵고 아까운 남자는 상수가 아니라는 것도 명백했다. 수영은 방 안의 어둠을 바라봤다. 거울처럼 자신을 또렷이 비추는 어둠. 부끄럽고 참담했다. 후회조차 할 수 없었다. 상실감을 감당하지 않으려 했으므로 종현에게 한 짓은 결국 도망이었다. 애정 없이 다가갔으므로 상수에게 한 짓도 결국 유혹이었다. 사랑했지만 사랑을 믿지는 않았다. 사랑을 원했지만 사랑만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종현이나 상수에게서 구하려고 했을 뿐 자신에게서 구하려고도, 차라리 깨끗이 체념해 버리지도 않았다. 누구라도 자신과 같은 처지였다면 마찬가지였을 것이라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 시간이 흐를수록 수영 때문이 아니라 미경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순전히 사랑해 준 사람,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가 어떻게 웃는지 가르쳐 준 사람. 수영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미경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수영은 가진 적이 없으므로 잃을 수도 없는 사람이니까. 자신이 선택했다고 여겼지만 기실 미경은 수많은 여자 중 자신의 여자가 돼 준 것이었고 그런 미경을 자신은 영영 잃어버린 것이었다. 함께 보낸 2년이라는 시간까지. 미경은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사랑해 준, 운 좋게 가질 수는 있어도 잃어버리면 되찾을 수 없는 사람. 자기가 좋은 사람이 못 됐기 때문에 결국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 싫고 서운했던 것들은 다 잊어졌지만 좋고 잘해 준 것들은 잊어지지 않았다. 상수는 미경이 선물해준 파자마를 버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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