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동네 도서관 신간서고에서 책을 고르는 걸 좋아한다.
새 책이라 깨끗하고 지금껏 이 주제로 나온 책들 중 가장 최신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화면해설작가'라는 단어를 보고 주저없이 이 책을 골랐다.
예능 프로그램에 자막을 다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인줄 알고서.
예능 볼 때 자막이 재미있는 예능을 골라보는 나로서는 흥미진진한 주제였다.
헐. 그러나 책을 열 페이지 정도 읽으니, 화면해설작가는 예능 프로그램 자막 작성자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시작장애인들이 영상물을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장면 장면을 해설하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화면해설작가들이었다.
그 글을 성우들이 읽고, 시각장애인들의 성우들의 음성을 들으며 자신들이 볼 수 없는 장면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나는 화면해설이 들어간 영상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이런 업계가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다.
화면해설작가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경험담과 생각을 들려주는 알토란 같은 글들을 모아 이 책이 나왔다.
어찌나 흥미진진하던지 책을 이틀만에 단숨에 읽어버렸다.
로봇이 변신하는 장면을 해설하기가 어려워서 로봇을 사다가 직접 조립해 봤다는 이야기,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서 구씨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할 일이 많았다는 이야기,
드라마에서는 특명 브랜드명을 언급하면 안 되는 심의 기준이 있어서 주인공이 쭈쭈바를 먹는 장면에서 쭈쭈바를 쭈쭈바라고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 등등의 구체적인 경험담들이 특히 재미있었다.
작업 시간이 대부분 늘 부족해서 밤샘 작업을 하기가 부지기수이고 일정에 변경이 종종 있어서 휴가 중에 일을 해야했던 경우도 있다는 열악한 작업 환경에 대한 토로도 있었다.
비경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보다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설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는 직업병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이 책을 읽고나서 빨래를 개면서 Wavve로 <소방서 옆 경찰서>를 봤다.
중간중간 빨래 개는 데 집중할 때는 장면을 놓치기 쉬우니까 화면해설을 듣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메뉴를 찾아봤으나 없었다.
알고보니 미국에 본사가 있는 넷플릭스, 유투브의 경우에는 법에서 의무화한 바와 같이 모든 콘텐츠에 음성해설이 있지만
한국 OTT인 Wavve와 Tving은 한국에 의무화하는 법이 없어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장치가 없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작년 10월에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소외 계층을 위한 미디어포용 종합계획'을 발표해서
폐쇄자막과 화면해설, 수어 등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방송을 기존의 실시간 방송뿐만 아니라 VOD, OTT 등에서도 의무적으로 제공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는 2025년까지 3단계에 걸쳐 추진될 예정이라고 한다.
사실 화면해설작가들은 장면을 단지 해설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상물 전체를 해석하는 사람들이다.
대사가 없지만 여운이 짙은 영화의 엔딩 장면, 또는 예술성이 짙은 독립영화의 장면들은 단지 보이는대로 해설한다고 해서
시각장애인들이 해당 영상물을 감상하는 것을 도울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화면해설작가들이 해당 장면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정확히 '이해'하고 '해석'해서 '기술'해야 한다.
이런 경우에는 화면해설작가가 제3의 감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소수자의 영상물 감상을 돕는다는 사명감으로 엄청난 전문성을 쌓으며 열심히 일하는 작가들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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