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에 은사의 소개로 소개팅을 했다.
소개팅남은 미국 펜실배니아 주립대에서 박사 과정 중에 있는 사람이었다.
내 원래 전공이 지구과학교육이라고 하니까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읽었냐고 물었다.
아직 읽지 않았다고 했더니, 과학 전공자라면 누구나 읽었음직한 책이라고 했다.
짜증이 일었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라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을 할 것이지.
나는 청개구리 심보가 있어서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그 책을 일부러 읽지 않는다.
빌 브라이슨에 대해서 알 기회를 그렇게 놓쳤다.
그로부터 몇 주 후 한 친구와 서점에 놀러갔는데
내가 여행 도서 섹션에서 기웃거리니까 이 책 <빌브라이슨 발칙한 미국 횡단기>를 선물해 주었다.
빌 브라이슨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여행을 좋아하지만 미국 횡단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이 책을 책장 한 구석에 꽂아 두고 관심이 가는 다른 책부터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친구가 이 책부터 읽으라고 앙탈을 부려서 집어 들게 되었다.
첫 문장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나는 아이오와 주 디모인 출신이다. 누군가는 그래야 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말투였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하며 작가 이력을 봤더니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썼단다.
잠시나마 심기가 불편해짐을 느낄 수 있었으나
불쾌한 과거 따위는 잊기로 하고 페이지를 넘겨 나갔다.
그러나 막상 작가가 미국 횡단 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생각했던 것 만큼 읽는 속도가 나지 않았다.
처음 듣는 지명, 인물, 역사 등이 끊임없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순 살이 된 빌 브라이슨이 30대 중반에 했던 여행에 대해 쓴 책이라
그가 언급하는 TV 프로그램이나 영화의 제목부터가 낯설었다.
그래서 그의 재기발랄하고 솔직한 글발이 더욱 빛났다.
이렇게나 낯선 곳에 대한 낯선 내용들을 350여 페이지에 걸쳐 읽게 만들다니
그 힘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 예리한 통찰력은 또 어떻고!
이렇게 난 빌 브라이슨 할아버지의 책에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
똑똑하고 유머러스한 할아버지를 알게 된 것 외에 다른 수확이 있다면
미국 지리를 좀 알게 된 것이다.
여태까지 친구들이 미국에 유학이나 이민을 간다고 하면
어느 주에 간다고 말해줘도 사실 머리 속에 그려지지가 않았다.
그저 이름을 좀 들어본 곳 또는 그렇지 않은 곳으로 분류될 뿐이었다.
(아, 다코타나 미시건처럼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추운 곳으로 종종 다루어진 주는 예외!)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내내 주가 바뀔 때마다 책 앞에 있는 미국 지도를 한 번씩 본 덕분에
이제는 주의 이름을 들으면 대략 미국의 어느 쪽에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것 뿐인가. 그 곳의 대략적인 특징도 함께 떠올릴 수 있다.
요컨대,
나의 관심사를 파악하고 책을 선물해 준 배려 깊은 친구 덕분에
미국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고, 빌 브라이슨 할아버지를 처음 만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앙탈에 이 후기로 고맙게 답할 수도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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